에스파는 데뷔 이래 ‘광야’라는 독자적 세계관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세계관 서사에 가려 음악 자체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첫 정규 앨범 《Armageddon》은 전환점이다. 타이틀곡 ‘Supernova’는 디스코와 일렉트로닉을 결합한 프로덕션 위에 중독성 강한 훅을 얹어 빌보드 핫100에 진입했고, 앨범 전체가 SM의 실험 정신을 가장 세련된 형태로 구현한 결과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총 13트랙의 장르 폭이 인상적이다. 뉴메탈 기타 리프와 EDM 드롭이 정면충돌하는 타이틀곡 ‘Armageddon’, 90년대 유로댄스를 현대적으로 비틀어낸 ‘Live My Life’, 트로피컬 하우스 위에 청량한 보컬을 올린 여름 앤썸 ‘Bahama’까지. 후반부에 배치된 ‘YOLO’와 ‘Prologue’는 멤버들의 보컬 역량을 부각하는 미드템포 넘버로, 앨범에 감성적 깊이를 더한다. 인트로부터 아웃트로까지 서사적 흐름이 있고, 트랙 간 음향 설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K-POP 걸그룹 앨범으로서는 드문 완결성을 갖췄다.
싱글 모음이 아닌 ‘앨범’
발매 첫 주 210만 장 판매. 빌보드 200 진입. 《Pitchfork》은 “K-POP의 최전선에서 벌어지는 가장 대담한 실험”이라 썼다. 숫자와 헤드라인만 보면 화려하지만, 《Armageddon》의 진짜 의미는 다른 데 있다. K-POP 걸그룹 시장에서 ‘앨범’이라는 포맷이 단순한 타이틀곡 운반체가 아니라 하나의 작품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에스파는 이 앨범을 통해 4세대 걸그룹 대표주자라는 수식어를 넘어 글로벌 팝 씬에서 독자적 위치를 만들었다. 프로듀서 켄지와 해외 작곡진의 협업이 빚어낸 사운드는 K-POP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그 너머를 지향한다. SM엔터테인먼트가 오랫동안 추구해온 ‘테크놀로지와 음악의 결합’이라는 비전이 마침내 설득력 있는 결과물로 나타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