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일이라는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번번이 달라진다. 영화음악 작곡가, 클래식 편곡자, 국악 크로스오버 프로듀서, 다큐멘터리 음악감독. 하나의 장르에 안주하지 않는 그의 이력은 그 자체로 한국 음악의 경계가 얼마나 유동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2018년 EBS 다큐멘터리 《당신의 밤은 나의 낮》에서 거문고, 대금, 해금을 오케스트라와 결합한 작업은 국악 크로스오버의 가능성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정재일의 작업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국악기를 서양 악기의 대체재로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이올린 파트를 해금으로 옮기는 식의 단순한 치환이 아니라, 국악기 고유의 시김새와 음색을 살리면서 서양 화성 체계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방식을 택한다. 거문고의 농현이 첼로의 비브라토와 만나고, 대금의 청소리가 오보에의 음색과 겹칠 때 만들어지는 독특한 사운드스케이프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시도에 대한 비판도 있다. 국악 순수주의자들은 전통 음악의 문법이 서양 클래식의 틀에 맞추어 변형되는 것을 경계하고, 클래식 쪽에서는 크로스오버가 양쪽 모두의 깊이를 희생시킨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정재일 스스로도 이런 긴장을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최근 작업은 융합보다는 ‘대화’에 가깝다. 국악기와 서양 악기가 하나의 선율을 나누는 대신, 각자의 언어로 같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사이의 간극 자체를 음악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정재일의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결국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한국 음악이란 무엇인가. 국악의 전통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 서양 클래식의 체계 속에서 한국적인 것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그의 음악은 이 질문에 답을 주기보다, 질문 자체를 더 풍요롭게 만든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